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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6 지루한 시 수업 시간 (4)

지루한 시 수업 시간

Posted 2006/09/26 13:30, Filed under: 맛있는 문학
이번 학기 내가 맡은 보충 수업 중의 하나는 "시가 깊이 읽기"이다. 나는 시가 재미있고 시 읽는 시간이 즐겁지만 아이들에겐 고통스러운 시간인가보다. 더군다나 "시대와 역사"라는 주제로 쓴 시들을 모아서 읽고 있다보니 한 20분쯤 설명하다보면 멍~해지는 녀석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수업 중간쯤 재미있을법한 것들을 몇 가지 준비해간다.

지난 주에는 [매미 그리기]를 했다. 수업용 프린트물을 뒤집으라고 한 뒤 "매미를 그려봐라!"라고 했다. 왜 시 수업 시간에 매미를 그리라고 하는지 생각을 좀 하면서 그리라고 힌트 아닌 힌트를 주었지만 다들 난리가 났다. 파리, 모기, 잠자리 등등등 온갖 형체의 곤충을 그려놓고 매미란다.

원래 정답은 없는 문제다. 시인이셨던 교수님이 낸 시험문제 중의 하나였는데 그 수업을 직접 듣진 않았지만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들이 퍽 당황했다고 들었다. 어쨌든 정답은 없지만 A+를 받은 답안이 있었단다.

그 학생은 큰 나무를 하나 그리고 옆에 "맴~맴~"이라고 써놓았다더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얼~ 머리 좀 썼는데?" "오, 똑똑하다" "신기하네" 등등 별 얘기가 다 들려왔고, 어쨌든 잠에서 좀 깨어났다. 그 교수님은 다른 시험에서 "우리 학교 분수대의 동그란 의자 개수는?"이란 문제도 냈었다고 말해주었더니 꽤 재미있어 하더라.

엊그제는 귀여니의 시를 잠깐 얘기했다. 칠판에 [명심해./하루만에 당신에게 반했다는 그 사람은/다음날 또 다른 사랑에 빠질수 있다는 걸]이란 귀여니의 시를 적고 제목이 뭐겠냐고 물었다. 맞춘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명심해]가 제목이라고 했더니 피식 웃었다. 귀여니가 썼다고 하니 그제서야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도 있었고...

어쨌든 저 시가 출판되었다는 기사 밑에 달린 답글 몇 개를 소개했다.
하이 / 헬로우 / 안녕 (제목: 제니퍼)
호랑이 / 기운이 / 솟아나 (제목: 콘푸로스트)
왼/손은/거들/뿐 (제목: 강백호)
아이들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던 답글은 "1/3/12/26/35/41/보너스 2 (제목: 로또 160회)"였다.

그 옆에 또 다른 시 한 편을 적었다.


늦 잠


꿈이 끝나면
저절로 잠이 깰테니
제발 좀
깨우지 마세요


김영수라는 고등학생이 쓴 시이다. 아이들에게 제목을 적지 않은 채 "이 시는 제목이 뭘까?"라고 물었더니 아직 답글의 웃음이 묻어나는 듯 킥킥대며 "꿈이요!", "잠이요!" 등등을 외쳐댔다.

[명심해]와 [늦잠]의 차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왜 사람들은 [명심해]는 시라고 생각하지 않고 웃긴 답글을 다는데 [늦잠]은 좋은 시라고 할까. 김영수는 여러분과 같은 고등학생이고 이 시는 그 학생의 시집에 실려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영수의 여친은 영희일 거라고 말했다가 재미없다고 항의를 받기도 했고;;;)

나는 <꿈>이라는 글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 꿈은 우리가 잠잘 때 꾸는 그 꿈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미래, 우리가 정말 원하고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꽤 진지한 눈빛으로 칠판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도 있었다. 내가 수업을 하면서 가장 즐겁고 가슴 벅차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이다.

매 수업 시간이 그 날 같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수업 준비가 부족해서 그야말로 "말발로 떼우는" 적도 있었고 아이들의 질문에 명쾌한 해설을 해주지 못한 적도 있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준비했다고 스스로 뿌듯해하다가 황망한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실망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라도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수업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리라 믿으련다.

다음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이거 벌써 밑천이 드러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
2006/09/26 13:30 2006/09/26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