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킬로그램의 우량아로 태어나 "외동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몰아서 받고 있던 나에게 7년 만에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동생이라는 낯선 존재의 등장이었다. 내 동생은 당시 초등학교 (그 때는 국민학교였다) 1학년이었던 나의 팔뚝만한 몸뚱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더니 줄곧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연히 부모님의 모든 관심은 동생에게 쏠렸고, 나는 투덜거리며 학교가 끝나면 동생을 보러 -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를 보기 위해서 - 병원으로 가곤 했다. 더 이상 받아쓰기 백 점 맞은 것으로는 우는 동생을 달래는 엄마의 관심을 받기 어려웠고, 아빠는 늘 "이젠 형노릇을 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배가 뒷동산만큼 불러올 무렵부터 '그래, 이제 나도 진정한 부하가 한 명 생기는구나!'라고 쾌재를 불렀었다. 부모님은 내심 딸이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남동생을 기대하고 있었다. 내 "쫄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 때 나의 강렬한 소망 덕분에 내 동생이 남자로 태어난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요즘은 정말 후회한다. 차라리 여동생이었어야 했던 것이다!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병원 신세를 지더니 줄곧 몸이 약했다. 그 가녀린 몸뚱이에 링겔 주사 꽂을 데가 어디 있다고 간호사들은 늘 내 동생에게 밴드와 호스를 주렁주렁 달아놓곤 했다. 학교 끝나고 놀러간 병실에서 여기저기 주사 바늘 흔적이 있는 이마빡에 핏줄 가득 세우고 엄마 품에 안겨서 울고 있는 동생을 보노라면 측은지심이 절로 생기곤 했다.
만감이 교차하던 신생아기를 거쳐 유아기로 접어든 이후, 내 동생이 본연의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네 살 무렵, 녀석은 세 발 자전거를 즐겨탔는데 우리 동네에서 내 동생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 동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비치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하체 탈의한 상태로 세 발 자전거를 탔다. 거기에 노란 장화는 필수 코디 소품이었다. 내 기억으로 녀석은 근 2년 가까이 그런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곤 했다.
내가 동생을 구타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다. 말이 좀 험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때 그건 분명 구.타. 였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동생은 6살. 어머니, 아버지는 아침에 나가셔서 저녁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학교 끝나면 유치원에 가서 동생을 데려오는게 내 일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유치원이 초등학교보다 일찍 끝나는 날에는 동생이 혼자 집에 와야 했는데 문제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부모님은 동생의 성격을 잘 아셨기 때문에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봐 열쇠를 주지 않았고, 열쇠를 숨겨놓는 비밀장소도 나에게만 알려주셨다. 보통 동생이 나보다 일찍 오는 날이면 현관문 앞에 유치원 가방을 던져놓고 예의 그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거나, 친구집에 가서 놀고있곤 했다. 그런데 가끔씩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동생이 보이지 않으면 정말 한 치의 보탬도 없이 나는 미.친.듯.이. 동생을 찾아 온 동네를 뒤져야했다. 초등학생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루트를 추적하다보면 해질녘 즈음에는 동생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시점부터 동생은 이미 동생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체면"을 생각해서였는지 동생을 발견하면 일단 조용히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현관문을 잠근다. 그리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동생은 울먹이며 방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따라들어가서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냅.다. 동생을 때렸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손으로 머리를 때리는 것은 약과였고 발로 찬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는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때리고 또 때려서 동생도 울고, 나도 울고 둘 다 힘이 빠져서 조용해질 그 순간까지 내 구타는 계속됐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동생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까지 구타는 계속 되었다. 물론 예전처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나의 행위는 계속되었다. 동생이 입었을 정신적 충격은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끔찍할 정도였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동생은 나에게 맞으면서 자랐고, 그 무서운 아부지보다 나를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어느날이었던가. 부모님이 열 번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동생. 내가 동생 방에 들어가서 "야! 지금 XX시니까 XX시 XX분까지 나와라." 딱 이렇게만 말하고 나왔다. 동생은 그 시간이 되기 전에 방에서 나왔던 적도 있다.
이런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몸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이 붙더니 지금은 키도 나보다 크고 몸무게는 0.1톤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동생에게 부모님은 말그대로 "공부는 못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의 신념으로 키우셨고, 동생은 몸으로 보답했다. "딴 건 몰라도 공부 하나는 제대로 해야된다!"는 신념으로 나를 키우신 것과는 180도 다른 방식이었다. 어쨌든 동생은 이제 거대한 몸집의 시커먼 사내 녀석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즈음, 부모님과 - 특히 아부지와 -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온갖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동생은 나 덕분에 부모님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조용히 사춘기를 넘겼다. 녀석의 신경질적인 사춘기가 절정에 달했을 시기에 나는 군대에 있었다. (하긴 동생의 사춘기는 얼마전부터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동생에게 직접 손을 대진 않았고,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나름대로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형제들이 서로를 위해주며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노라면 내 얼굴만 봐도 얼굴이 먼저 경직되고 나를 슬슬 피하는 동생의 모습이 더없이 가슴을 아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입대를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훈련소의 그 첫날밤. 아부지 생각 1시간, 어무이 생각 1시간하고 동생 생각을 2시간 넘게 했다. 그리고 자대 배치.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자대 고춧가루 고참의 일명 얼차려. 얼얼한 뺨과 묵직하게 아린 배를 어루만지며 잠자리에 누웠는데 왈칵 동생 생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 평생 가장 후회할 일은 첫사랑과 헤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동생을 때렸던 기억은 피할 수 없는 칼이 되어서 내 심장을 도려내고 있었다. 한 살 어린 고참이 축축해진 베개를 만져보고 나를 깨워서 담배를 한 대 주며 물었다. "많이 서럽냐? 군대가 다 그렇지뭐." 그 고참은 내가 맞아서 우는줄 알았겠지만 나는 동생 때문에 울었다. 그 어린 고참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 역시 누군가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휴가를 나와서 나는 정말 동생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기 시작했다. 정신없던 백일 휴가 이후, 일병 휴가를 나온 내게 동생이 말했다. "형, 왜 이래! 군대가더니 미친거야? 아놔, 진짜 적응안되네 이거... 징그러워, 쫌!" 녀석이 웃었다! 나를 보며 진심으로 웃으며 농담을 건넨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제대하던 날, 나는 동생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지난 날의 구타를 사과했다. 동생은 이미 나보다 몸집이 커져있었고, 수염도 까칠했다. 내가 보기엔 아직도 어린 애 같은데 이젠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괜찮아, 적응안되게 왜 이래. 사실 그 때 좀 아프긴 아팠어." 그날 밤 나는 또 울었다.
너무 약해서 제대로 자랄 수나 있을지 걱정되던 녀석이 0.1톤의 거구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언제나 내게는 작고 여리기만 한
동생 녀석이 내일이면 대입수능시험을 치르게 되었으니 동생을 바라보는 내 마음엔 온갖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덩치만 컸지 순해빠진 내 동생은 가톨릭 사제가 되고 싶어했다. 지금은 성적도 부진하고, 자신의 장래에 대한 확신도 조금 부족해보여서 걱정이다. 막상 시험이 닥치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동생을 보면서 걱정과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며칠 전, 동생방에 가서 한 침대에 같이 누웠다. 동생은 또 "아, 진짜! 징그럽게, 쫌!"이라고 했지만 기어이 내 옆에 눕게 만들었다. 아직은 내 힘이 통하는데다가 "7살 연상"이라는 무기는 쉽게 녹슬지 않는다. 그 날 나는 동생에게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공부 못해도 좋고, 신부가 안되어도 좋다. 하지만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는 내 동생이 돈을 하루에 백 억씩 벌어도 행복해하지 않으면 싫다. 네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해보고 최선의 답을 찾기를 바란다. 형아는 당장 낼모레 졸업이고 취직해서 먹고살 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국문과 입학한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너도 남이 뭐라든 정말 하고 싶은 일 해라"
일어서서 동생 방을 나서려는데 동생이 나를 부른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리 동생이 나를 부르면 내가 움.찔.한다. 동생이 그 큰 덩치로 스윽 다가와서는 나를 껴안았다. "형, 고마워." 나는 정말 미친듯이 웃어제꼈다. 그래, 이제 우리도 "태극기 휘날리며" 부럽지 않은 형제애를 과시할 수 있게 된거야! 앗싸!
내일 이 시간, 동생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보다 나은 학교교육을 하겠다는 심정으로 교직을 목표로 앞둔 지금, 동생의 고민과 앞으로 겪게 될 온갖 역경들을 쉽게 넘길 수가 없다. 또 케케묵은 위로의 말을 건네야하겠지. 내가 들었던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이제까지 착한 형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최근에서야 몇 번 맛있는거 사다주고, 선물 몇 개 사준 게 전부다. 속이고, 협박하고, 을르고, 위협하고, 깐죽대고, 놀려먹기만 했던 형이었다. 내일 시험이 끝나면 맛난 밥도 사주고, 옷도 골라주고, 같이 게임도 하고, 멀리 여행도 같이 가는 착한 형이 되어봐야겠다.
+ 참, 내 동생이 어렸을 적 앓았던 수~많은 병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었던 것은 "오른쪽 무릎의 수상쩍은 푸른 흔적"이었다. 실핏줄이 뭉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피멍이 든 자국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흔적은 동생이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는데 의사들도 병명을 모르겠다고 했단다. 온갖 조직검사며 갖은 검사를 다 해봐도 뭔지 알 수가 없었단다. 거의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일단 그 부분은 지켜보기로 결론을 내렸단다.
그것은 알고보니 "몽고만점의 변종"이었다;;
+ 참, 내 동생의 비밀 하나. 이 자식, 어렸을 때는 Fire Egg가 짝짝이였다. 우리 아부지 고향 동네에서는 태산ㅂㅇ이라고 한다는 바로 그것. 요즘은 거뭇거뭇해져서 제대로 확인을 못해봤다. 시험 끝나면 목욕탕 가서 자세히 검사해봐야겠다. 히힛. 동생 미안~ ^^a